나의 군대생활 17
33.낙동강 오리알과 사마리아인
어느 토요일 점심시간 퇴근할 무렵, 야전 병원 안의 한쪽에 자리 잡고 있던 창(倉: 군대에서 의약품을 보관하고 예하의 하급부대에 의약품을 배급하는 기관, 창고) 에 들렀는데 전방 사단 의무대에서 약을 타러 앰블런스를 선임탑승하고 온 ROTC 15기 동기 한명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몇 번 만난 적은 있지만 친한 사이는 아니어서 그냥 건성으로 인사만 나누는 정도의 사이였는데 갑자기 그가 주말이니 자기네 부대로 놀러가자고 제안을 해왔다. 나는 낯선 곳에 가는 것도 그렇고 친하지도 않은 친구에게 신세 지는 것도 별로 마음에 내키지 않아 망서렸는데 그는 자기가 나를 자기네 동네에 데리고 가서 두루 구경시켜주고 재미있게 잘 대접해 주겠다며 조르다시피 계속 적극적으로 꼬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생각해보니 그 주말에 비오큐에서 혼자 있으려니 딱히 할 일도 없을 것 같기도 해서 나는 얼떨결에 그럼, 그럴까 하며 그 자리에서 바로 그의 차에 함께 탑승하여 양구까지 가게 되었다. 오후 1시 쯤 출발하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흙먼지가 풀풀 나는 꼬불꼬불한 산길을 서너시간 이상 달려 그 곳에 도착했고 앰블런스를 사단으로 들여보내면서 그와 나는 읍내 입구에서 내렸다. 그런데 그때가 토요일 저녁 다섯시 반이나 여섯시 쯤이어서 사단 본부에서 많은 장교들이 퇴근하면서 밥집이나 술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우리도 부대 앞 식당으로 가고 있었는데 그가 몰려가던 동기들을 만나자 그 보병 동기들에게 내가 같은 15기 동기라고 소개 하였다. 그러자 그들이 우리와 같이 식사하러 가자고 제안하였고 그래서 우리는 함께 식당으로 걸어갔는데, 가는 도중에 나를 데리고 갔던 그 동기가 느닷없이 갑자기 자신은 갈 곳이 있다며, “그래, 그러면, 너 쟤들이랑 같이 가라” 하고는 내가 뭐라고 말 할 사이도 없이 나를 버려두고 휑하니 내빼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못하고 그를 잡을 생각도 못하였다. 그냥 이게 무슨 상황인가 하고 생각하며 멍하니 멀어져가는 그를 쳐다보고 서 있다가, 얼떨결에 잘 알지도 못하던 동기들이 이끄는대로 졸지에 함께 식당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처음부터 그는 나를 데리고 가서 대접할 생각이 없었고 아마도 먼 길을 혼자 선임탑승하고 돌아가기가 심심해서 말동무로 나를 함께 데리고 갔지만 막상 부담이되어 버리고? 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까지도 나는 그가 했던 그 어이 없는 행동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리고 이런 경험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 이었다.
나는 갑자기 떠나오느라 수중에 현금도 거의 없었고 그렇다고 전방 산골짜기에 은행이 있을리 만무했다. (당시에는 ATM 은 물론 현금인출카드도 존재하지도 않았다). 소심하고 내성적이었던 나는 이제 밖은 캄캄해졌고 얻어타고 돌아갈 차편도 없는 상황에서 홀로 낯선 곳에 버려져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자 이 상황을 헤치고 나갈 자신이 없고 불안해져서 크게 낙담하였다. 지금 같으면 배짱 좋게 가까운 사단이나 군부대 비오큐에 무작정 찾아가 하룻밤 재워 달라고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 때는 정말 그럴 용기도 없었고 그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당시에 양구에 내가 아는 사람이라곤 김건남 중위 밖에 없었는데 그가 있는 205 이동외과병원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고 갑자기 연락도 없이 야밤에 밤 늦게 그를 찾아간다는 것도 이상했다.
그래서 동기라고는 하지만 일면식도 없는 보병 소대장 친구들을 따라가 얼떨결에 밥과 술을 얻어먹었는데 혹시나 하며 기다려도 밤이 늦도록 나를 내려놓고 간 동기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함께 술을 마시던 동기들은 하나 둘 흩어지고 마지막에 어떤 보병 소대장 동기와 함께 남아있게 되었는데 동기이긴 하나 그 와도 물론 생면부지의, 알지 못하는 초면이었다.
그런데 그가, 갈 곳이 없었던 나의 사정을 알았던지 아니면 내가 딱해 보였던지, 술이 취한 상태에서, 하꼬방 같은 어떤 낡고 허름한 술집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그곳은 여자들이 나오는 술집이었고 우리는 별로 말도 많이 하지 않았고 술을 조금 더 마셨던 것 같다. 그러다 자정이 지나자 그 후 그는 한 여자를 데리고 사라졌고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였는지 그 중의 한 여자가 나에게 작은 방을 치워주며 주무시라고 하였다. 나는 길바닥에서 밤을 보내지 않게 된 것 만으로도 감지덕지하여 그녀에게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통금도 넘었고 스트레스 때문에 힘들고 피곤하기도 해서 나도 옷을 입은 채로 방 한 쪽 구석에 지쳐 쓰러져 잠이 들었다. 과묵해보이던 그는 내게는 어떠한 귀뜸도 해주지 않았는데 새벽에 잠결에 목이 말라 일어나보니 곁에 웬 여자가 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숫총각이었던 나는 물론 그냥 잠만 자고 나왔지만, 그래서 얼떨결에 잘 알지도 못하는 동기로부터 황당한 접대를 받은 이야기.. 다음날 아침 일어나 그를 찾아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려고 보니 이름도 소속 부대도 모르는 그는 새벽 일찍 일어나 이미 떠나가고 없었다.
나는 그곳을 나와 물어 물어 이동외과병원을 찾아가 건남이를 만났다. 그리고 반갑게 맞아준 그와 함께 해장국을 먹고 읍내 구경을 하고 오후에 군단으로 돌아가는 트럭을 만나 차를 얻어 타고 부대로 돌아왔지만 정말, 꿈을 꾸듯 황당하고 기이한 경험을 한 주말이었다. 동기의 말만 믿고 무작정 따라 나섰던 내가 바보이긴하지만, 그때까지 이런 이상한 일은 겪어본 적이 없었던 나는 그때서야 사람들의 말을 절대로 100 퍼센트 믿으면 안되고 세상에는 믿지 못할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 일은 예상치 않게 겪게되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도 우리는 또 사마리아의 선인을 만날 수도 있다는 것을, 또는 어떠한 극한 상황에서도 사람은 죽으라는 법은 없는 것 같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 사건이기도 했다. 이 사건 이후, 나는 살아가면서 무슨 일을 결정할 때 100 퍼센트의 확신이 서지 않으면 그것은 하면 안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나는 그 후에 먹을 것도 잘 곳도 없었던 불쌍한? 나를 하룻 밤 거두어준 그 친구가 고마워서 보답하려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가면서 백방으로 그를 찾아보려 했지만 그가 최전방 보병 소대장이라는 것 외에는 이름도 기억이 안나고 소속부대도 몰라 찾을 길이 없었다. 까마득한 옛날의 기억이지만, 지금이라도 혹시 이 일이 생각나는 친구가 있다면 내가 보답할 수 있도록 나에게 연락 해주었으면 좋겠다. 친구야, 그때 정말 고마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