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군대생활 13
27. 전임 약제과장에 관한 소문
내가 부임했을 당시 나보다 한참 전에 봉직했던 전임 약제과장에 대한 이야기들이 소문으로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었다. 그분은 모 대학 약대룰 졸업하신 ROTC 출신이었다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전방으로 온 후 결혼을 약속한 애인과 헤어지기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괴로움으로 잠을 못 이루던 그는 매일 밤, ‘바륨’ (상품명 Valium, 화학명 Diazepam ) 이라는 신경안정제를 한알씩 복용하고 잠을 청하였는데,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이 계통의 약물은 소위 화학구조 상, 벤조다이아제핀 류 (Benzodiazepines) 라고 하여 습관성, 중독성이 강하여 마약류로 관리되는 향정신성 약물이며 매일 규칙적으로 사용하면, 우리 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약물에 중독되어 갑자기 투약을 중단하면 금단증상이 나타날 수도 있고 또한 내성이 생겨 계속 복용시 같은 양에 대한 효과가 떨어지므로 복용량을 계속 늘려가야하며 부작용도 많은 위험한 약물이다.
그런데 매일 밤 이 약물을 계속 복용한 그는 그만 바륨에 중독이되어 한알 두알 용량을 늘려가다가 급기야는 한웅큼씩 복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향정신성약물로 특별히 관리되는 이 약물을 불법으로 대량 훔쳐 복용하게 되었다. 이 약물에 중독되면 나타나는 또 한가지 부작용은 자신을 제어하는 통제 능력이 없어지고 ( disinhibition) 옳고 그름를 판단하는 판단력이나 통찰력에 이상이 오게되는데 따라서 그는 여러가지 이상 행동을 보였다고 한다. 예를들어 누가 소화제 좀 달라고 하면 한병을 통째로 집어주거나 원하는 대로 마음껏 가져가라고 한다거나 하는 비상식적이고 불법적인 행동을 아무 거리낌없이 했다고 한다.
군대에서는 물품을 취급하는 부대는 정기적으로 검열을 나오는데 병원 약국도 3개월마다 재고조사와 업무감사를 받는다. 어느날 검사관이 약제과에 감사를 나와 보니 그 큰 약국 창고가 텅 비어있더란다. 그래서 정밀 감사 후 그는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이등병으로 강등된 후 징역을 살고 전역조치 되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였다. 황당한 이야기이지만 사실 이 때에는 장부상에 아스피린 35331알 하고 쓰여있으면 실제로 알을 모두 일일이 세서 숫자를 맞추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나도 검열 때가 되면 모든 약품의 현재 재고를 세어 맞추고 모자라는 것은 병원장의 지시로 의사들로부터 가짜 처방전을 받아서 장부와 실재 재고의 숫자를 맞추는 일을 계속하였고 심지어 장부 숫자 보다 남는 약은 쓰레기장에서 소각시키는 일도 있었다.
병원에 보급되는 약품의 양은 생각보다 엄청나게 많아서 포도당 주사 같은 수액제만해도 약제과에 달린 창고에 몇 백 박스 씩 가득할 정도였고 화상환자를 위해 보급되는 값 비싼 혈장대용제 플라스마나 영양주사제 들도 분기마다 서너병씩 지급되었는데 이 약품들은 병원장이 감추어 두었다가 사단장, 포사령관, 군단장님을 위한 뇌물로 사용되었다. 즉, 이들이 병원이 들르면 간호부장이 간호장교들을 데리고 나가 접대하고 마사지를 해준 후 영양제를 놓아주는 식이다. 병원장은 수시로 나에게 이들 약품이 몇개가 남았는지 물어보고 아무도 사용하지 못하도록 캐비넷에 넣고 자물쇠를 잠가 관리 통제하였고 멀쩡한 장군들이 이들 수액제를 맞고 가면 서류 상으로는 엉뚱하게 입원한 사병들이 맞은 것으로 기록되곤 하였다.
또한 3개월마다, 군에서 보급되지 않지만 필요한 약들을 구매하라고 현금으로 몇백만 원 정도가 지급되었는데 나는 돈을 만지고 구설수에 오르는 것이 싫어 약을 사러 서울로 출장가는 임무를 군단 분창의 보급장교에게 맡겼다. 그는 내가 필요한 약품의 리스트를 적어 돈과 함께 건네주면, 휴가도 나가고 가짜 영수증으로 돈도 좀 남기고 할 수 있으니 이게 웬떡이냐 하며 내 대신 기꺼이, 즐겁게 이 일을 맡아 하였다.
28. 쇼비니스트 대 공처가
이때 기억나는 분들로는 나의 고등학교 7년 선배들이신 신경외과 차선배와 피부과의 김대위님이 계신데 이 두분은 결혼하여 가족들과 함께 관사에 사셨다. 차선배님은 전형적인 케이 에스로 집안도 유복하고 아버지와 동생도 모두 의사인 집안의 맏아들이셨으며 벌써 다섯살 예쁜 딸과 세살 먹은 아들이 있어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계셨고 통이 크고 호방한 성품이셨다. 형수님은 전방의 산골짜기에서 신랑이 퇴근하기만을 기다리시며 힘드셨을 터인데도 항상 밝게 웃으시며 남편을 깎듯이 모시는 전형적인 현모양처이셨고 나는 이름도 모르는 서양요리 등 여러가지 요리를 잘하셨다. 그때 촌놈인 내가 차대위님댁에 가서 프렌치 드레싱을 얹은 야채 샐러드를 처음 먹어본 일이 기억난다. 선배님이 여러 가지로 핑계를 대어 혼자 헤매는 총각 후배인 나를 귀여워하며 늘 데리고 다니셨고 자주 관사로 불러 맛있는 식사를 대접해 주셨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겠으나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일요일 오후, 차대위님은 나와 또 다른 군의관과 함께 심부름 나가는 병원장의 찝차를 얻어타고 인제 읍내에 나가서 중국집에서 대낮부터 요리와 빼갈을 좀 마셨다. 당시만해도 그곳은 매우 작은 소읍이고 인구도 많지 않은 시골이라 일요일을 맞아 외출 나온 군인들 밖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 읍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다른 군인들과 마주치기 일쑤였다. 식사 후 읍내를 돌다 우리는 그곳에서 간호장교 정대위 와 또 다른 간호장교 한명을 만나 어쩌다보니 함께 저녁까지 하게되었고 술을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밤 열 한시가 넘게 되었다. 차선배님은 꽤 취하셔서 집에까지 모셔다 드리게 되었는데 택시를 타고 관사에 도착하니 열두시가 훌쩍 넘었다.
그런데 우리가 선배님께 안녕히 주무시라고 인사를 하고 병원숙소로 돌아가려할 때 갑자기 차대위님은 간호장교 두명과 나를 막무가내로 자신의 집 안으로 밀어넣더니 잠자는 아기를 안고 있던 형수님에게 손님들이 왔으니 술 상을 봐 오라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어쩌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하고 도망갈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아무 말 없이 부엌으로 들어가신 형수님께서는 개다리 소반에다 맥주 네병에 마른 안주를 준비하여 들고 오셨다.
나는 형님께서 진정이 되시자마자 간호장교들을 데리고 관사를 빠져나왔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얼굴조차 붉히지 않고 형님의 지시 사항을 다소곳이 따르시던 그 단아하시던 형수님의 모습이 지금도 생각난다. 일요일 하루 종일 관사에서 아기를 돌보며 남편을 기다리던 형수님의 기대를 배반하고 실컷 나가 놀다, 한밤중에 아무리 직장 동료이지만 여자들까지 집에 몰고와 술상을 차려내라는 남편에게 싫은 표정 하나 없이 순종하던 여인.. 정말 지금은 상상할수도 없는 일이다. 이렇게 보면 마치 차대위님이 무지막지한 쇼비니스트처럼 보이지만, 아니 그 분은 크리스마스 이브나 결혼기념일에는 아내를 위하여 선물을 준비하고 파티를 열어주는 멋진 분이셨다. 차대위님의 지론은, 안사람은 집안 살림 잘하고 아이들 잘 키우고 시부모님과 남편에게 순종해야 집안이 편안하다는 것이었는데, 지금 같으면 말도 안된다고 여성들의 아우성이 빗발치리라..
반면 피부과 김대위님은 미스코리아 출신의 빼어난 미인을 아내로 두고 있었는데 매일 아침밥을 굶고 출근하여 병원 피엑스에서 빵과 우유를 사 드셨다. 사실인지 모르지만 소문에 의하면 미인이신 형수께서 아침 일찍 일어나면 몸이 망가진다고 늦잠을 주무시기 때문에 아내가 차려주는 아침 밥상은 꿈도 못 꾸신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극과 극의 두 선배들을 보면서 총각이었던 나는 여자와 결혼에 관하여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도 나는 선택을 하라고 한다면 쇼비니스트적인 남자인지라 아무래도 차대위님의 스타일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것을 배워 지금도 집에서 마누라에게 밥상 차려내라고 말로만 큰 소리치며? 사는지도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