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군대생활 9
22. 군대에서 쥐약 먹은 이야기
50연대 의무중대에서 근무하던 어느날, 사병들이 덥다고 오렌지 주스를 타 먹고 있었다. 그러면서 같이 근무하던, 식품 영양학 전공의 초급대학을 졸업하고 가업인 소규모의 식품공장을 이어받을 것이라는 의무대 부중대장 김승환 소위가 위생병에게 나에게도 주스를 한잔 타다 주라고 이야기하였다. 그래서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여기는 부대원들이 여름이면 당시 유행하던, 미군부대에서 흘러 나온 ‘탱’ 이라는 오렌지 쥬스가루를 사다가 타 먹나보다 하고 생각하며 가져다 준 주스를 한 모금 마셨는데 맛이 좀 이상한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그 위생병에게 이 오렌지 주스 가루가 어디서 난 것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병사는 아주 자랑스럽게 뽐내며, 이것은 우리 의무대만의 특수 보급품 중의 하나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리 우리가 미군 군수 의약품을 많이 받아 타쓰고는 있지만, 여름에 주스를 타 먹으라고 오렌지 주스 가루까지 공급해 준다는 것은 너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병사에게 그 병을 가져와 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가져온 오렌지 가루가 담긴 병의 영어로 된 성분명과 사용법을 찬찬히 읽어 보니, 맙소사, 아니 이건 쥐약이 아닌가 ?!!! 그것은 소위 쥐약으로 사용하는 불소 화합물 중의 하나로 쥐들이 잘 먹도록 오렌지 향과 단맛을 첨가하여 만든 미제 쥐약이었다. 그것을 잘 모르던 어떤 위생병이 그 가루의 오렌지 냄새와 색깔의 겉 모양만 보고 오렌지 주스라고 착각하여 여름이면 전 중대원들이 돌아가며 물에 타서 먹기 시작한 모양인데 내가 이거 쥐약이라니까 선임하사를 비롯하여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병사들이 모두 비명을 지르며 놀라 자빠지고 말았다.
다행이 이 화합물은 한번 먹어서는 치명적인 것은 아니고 쥐도 여러 번 먹어야 비로소 혈액응고 기능이 마비되어 피를 흘리며 천천히 죽어가는 그런 제품이었다. 따라서 그 가루를 계속 열심히 여러번 매우 많은 양을 찐하게 타 먹었다면 의무중대원들은 괴기 영화의 한 장면처럼 모두 구멍마다 피를 흘리며 천천히 죽어갔을 판!. 믿지 못하겠지만, 쌍팔년도 한국 군대에서만 실제로 일어날 수 있을 수 있었던, 황당무계한 사건이었다.
23. 주임상사와 면도용 쉐이빙 크림
이것도 비슷한 이야기. 어느날 저녁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으나 연대 본부 주임상사가 나를 다목리 삼거리에 있던 자신의 집에 초대하여 저녁식사를 대접하였다. 우리는 식사하고 술도 한 잔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는 갑자기, 요사이는 이런 크림을 구할 수 없냐고 하면서 나에게 매우 오래되어 보이는 다 써서 짜투리만 남은 무슨 연고 튜브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말인 즉슨, 그것은 수염 깎을 때 쓰는 쉐이빙 크림으로 자신이 몇년 전에 미군 부대 의무 중대 싸전 (중사, sergeant ) 으로 부터 특별히 귀하게 얻은 것인데 거품이 아주 잘 나고 향기도 좋아 면도하기에 딱 좋아서 자신이 아껴 썼는데 이제 다 썼다, 그러니 이 제품을 하나만 더 구할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그 때에는 시중에 국산 쉐이빙 크림같은 제품은 아직 없었고 우리는 이발소에서 해주는 것처럼 보통 비누 거품을 만들어 누런 털이 길게 달린 탐스러운 솔로 얼굴에 칠하고, 아니면 그냥 대충 비누를 얼굴에 문지르고 면도를 하였었다. 나는 군대에서 면도용 쉐이빙 크림을 나누어 준다는게 아무래도 좀 이상했지만, 미군들은 부자이니 그럴 수도 있겠고, 참 자상하게 별 것을 다 나누어 주는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면서 요즘에는 국산 약이 잘 나와 군대 보급품도 미제 암포젤 같은 약 몇 병 외에는 모두 국산 약으로 바뀌었으며 연고나 크림은 대부분 국산품 이라고 말 하였고 그래도 같은 성분의 비슷한 국산 제품이 있을지 모르니 성분이 무엇인지 한번 살펴보자고 하면서 영어로 된 작은 글씨를 읽기 위해 그 튜브의 접힌 부분을 살살 펴 보았다.
그런데, 아, 그런데 !! 잘 보이지도 않는 깨알 같은 글씨들을 밝지도 않은 전등빛 밑에서 찬찬히 읽어보니, 그것은 놀랍게도 면도용 크림이 아니라 미군 의무대에서 병사들에게, 외출 나가기 전에 성병 방지 및 임신 방지용으로 나누어 주었던 거품이 잘 나는 살정제 (spermicide foam) 였던 것이다 !!! 아연실색한 나는 그에게 이것을 무엇이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몰라서 한참 동안 웃지도 울지도 못하였다는 이야기… 그는 거사 전 여성의 그곳에 발라야 할 거품 약을 자신의 턱과 코 밑에 바르고 콧노래를 흥흥거리며 기분 좋게 계속 면도를 하였던 것이었다. 거품제제이니 거품 하나는 정말 잘 났겠지만 피부 소독도 좀 되었을라나… 무지하고 순진했던 그 시절, 한국 군대 안에서 일어났던 웃지 못할 이야기..